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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eenie
댓글 0건 조회 354회 작성일 24-09-07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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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홀로 고스톱로버트 퍼트넘,『나 홀로 볼링』경향신문 특별취재팀,『어디 사세요?』 길지도 않은데 너무나 불편해서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발생한다.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다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알 듯 말 듯한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말까 머릿속에서 고민이 된다. 아는 척을 하지 않기에는 어느새 서로 낯이 익은 사이이고, 아는 척을 하자니 어색하다. 그래서일까? 엘리베이터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혹여 눈길이 교차될까 봐 최대한 딴짓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핸드폰이 제공한다. 다들 머쓱한 순간을 맞이하면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각자 핸드폰을 꺼내든다. 완벽한 타인도 아니고 대충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치르는 이 순간의 멋쩍음은 왜 발생할까?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사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와 그 사람이 한 집단으로 묶인다면, 그 사람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호칭은 국민일까? 시민일까? 아니면 ㅇㅇ아파트 1402동 입주민일까?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사람이 살기에 기후도 적당하다 보니, 사람들까지 품성이 온화하여 낯선 이방인에게도 친절한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부럽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부러움은 질투와는 다르다. 질투는 경쟁자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나와 별다를 바 없는 외모를 지닌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면 질투가 생긴다. 하지만 후광이 비칠 정도로 완벽한 몸매와 얼굴을 지닌 사람을 감히 질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질투라는 감정이 생길 틈도 우리에게 주지 고스톱 않는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우린 그 순간 질투심을 버리고 그저 부러워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질투였다. 적당한 기온, 한적하다고 느낄 만한 인구밀도와 쾌적한 환경은 살인적인 인구밀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사람이 질투를 느끼도록 하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질투심은 점점 부러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계절 따뜻한 아열대기후 지역에서 난방장치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름과 겨울을 반복하며 1년에 50여 도가 넘는 온도의 차이에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나라의 사람이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기후와 자원은 우리가 따라잡고 싶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조건들을 갖춘 나라를 질투하는 건 부질없다. 그래서 그냥 부러워하기로 했다. 부러움의 끝에서 심지어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되는 가정법에 빠지기도 했다. 만약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한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그래서 한 개인에게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집합체를 지칭하는 어떤 일반명사가 따라다니는가에 따라,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멤버십이라면 질투의 대상이다. 하지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멤버십이라면 질투십을 무력하게 만든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멤버십을 때로는 인종이, 때로는 국적이 결정한다. 어떤 멤버십을 갖고 태어났는가에 따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이라는 조건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한다.“하면 된다”는 격언은 사실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하얀 거짓말에 가깝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만약 그 사람이 유럽인이 이주하기 고스톱 전부터 살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본래 주인 애버리진Aborigine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애버리진에게는 백인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에게만 비밀리에 배부된 멤버십이 발급되지 않았다. 멤버십 없는 국외자들이 처한 운명의 서러움을 애버리진만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또 어디 있으랴. 1900년부터 무려 1972년에 이르기까지 강제적으로 실시된 원주민 개화 정책에 따라 애버리진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격리된 채 강제로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했다. 우리가 여행객들이 부러워할만한 기후 조건을 갖춘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의 ‘도둑맞은 땅’에 불과하다. 이렇듯 한 개인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에 따라, 또 어느 집단이 그 사람에게‘우리’라는 호칭을 허용하는지에 따라 운명은 달라진다. 개인이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는가에 따라, 운이 좋은 개인은 개인의 능력 이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같은 강도로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신중현이 영국인이었다면 폴 매카트니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는 신중현이 될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이 소속된 집단이 별 볼 일 없다면,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삶도 별 볼 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 사람들은 사회학자가 아니어도 본능적으로 혹은 삶의 경험에 따라서, 개인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 가에 따라 그 운명이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바로 이 점에서 학문적 지식과 사람들의 삶의 경험에 의해 깨달은 삶의 지식이 교차한다.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다. 무리를 지어야만 생존할 수 있어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사람이 속한 무리는 때로 개인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어떤 고스톱 무리에 속하는가, 혹은 어떤 무리가 그 사람을 받아들여 주느냐에 따라 개인이 생존하는 모습은 달라진다. 어느 대학의 동창회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증폭될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다. 무리가 제공하는 이득의 달콤함에 눈을 뜬 사람들이 집단을 이룰 때, 패牌가 형성된다. 패거리는 이익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무리이다. 그래서 패거리는 그 안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패거리를 구성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패거리끼리 나누어 갖는 이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패거리가 이익집단화된 패당은 없어도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패당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패당이 싫다고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아갈 수도 없다. 패당을 물리치는 일은 패당과는 다른 인간의 무리를 만듦으로 가능하다. 이런 인간의 무리를 우리는 이웃이라 명한다. 이웃한 사람끼리 만들어 내는 무리인 이웃은 패당처럼 당장의 이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패당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급조된, 그렇지만 이익이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매우 강한 연대감으로 뭉치는 무리이다. 하지만 이웃은 다르다. 이웃은 급조될 수 없다. 이웃은 급조될 수 없는 무리이기에,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며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패당과 달리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집어등을 향해 꼬이는 물고기 떼처럼, 이윤의 둘레에만 무리가 형성되는 사회에선 이웃은 무력하기만 하다. 이웃이 살해된 묘지 위에서 패당이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독버섯처럼 자란다. 관념으로서의 대학 동문은 이웃이지만, 사실로서의 대학 동문은 패거리에 가깝다. 대학이 졸업생에게 제공하는 최고의 선물은 지식과 교양이 아니라 고스톱 동창회라는 패거리에 가입할 수 있는 멤버십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개인의 삶은 어느 대학의 졸업장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됨을 삶의 경험 속에서 깨우친 사람은 대학 시절 몰랐던 졸업장의 숨겨진 진가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집어등의 물고기처럼 동문회에 몰려든다. 같은 대학 출신임이 확인되자마자 형 동생이 되고 누나 오빠가 되며,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제님 자매님이 되어버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 이유가 거룩한 믿음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이익 보장을 위한 멤버십임을 숨기고 있다. 패거리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려워한다. 패거리 내에서 개성은 사치이자 위험 요소이다. 패거리는 유니폼을 좋아한다. 패거리 내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은 개성이 아니라 동질성이다. 속물들이 이익을 탐하기 위해 패거리를 형성하고 패당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도당徒黨이 되었을 때, 패당에 염증을 느끼고 돌아선 사람들이 이웃을 만나고자 해도 환영해 줄 이웃이 없을 때,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의 책 제목처럼‘나 홀로 볼링’이 벌어진다. 퍼트넘의 한국어 번역판은 원제목‘볼링 얼론Bowling Alone’의 충실한 직역인『나 홀로 볼링』을 제목으로 선택했다. 볼링이 우리에게 대중화된 스포츠가 아니기에 직역 대신 문화적 맥락의 번역까지도 시도해 본다면, 퍼트넘의 책 제목은 다소 경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나 홀로 고스톱’으로 옮겨 볼 수도 있겠다. 도박의 목적이 아닌 재미로 치는 고스톱의 진짜 매력은 게임 그 자체보다 같이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수다에 있다. 그래서 재담이 넘치는 사람과 고스톱을 치다 보면 시간 가는 고스톱 줄도 모르고 빠져들기도 한다.하지만 혼자 고스톱 치는 광경을 생각해 보라. 혼자서 하는 고스톱만큼 재미없는 오락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하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혼자서 고스톱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같이 고스톱을 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이웃이 없는 사람들이 혼자 볼링을 치는 해괴한 현상이 발생하듯이, 한국에선 혼자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패당은 서로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형성되지만, 호혜적인 공동체인 이웃은 정주定住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부동산 유목민인 한국에서 정주할 수 있음은 그 자체가 특권이다. 정주의 가능성은 사람에게 없다. 정주의 명령은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 내린다. 부동산 가격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주할 터를 결정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맘대로 결정할 수 없다. 정주의 터는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결정한다. 각자가 살고 있는 그곳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지도 거주민이 결정하지 못한다. 그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주체는 부동산 가격이다. 부동산 가격의 변동을 통제할 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은 정주의 터가 아니라 허가받은 임시 거주지에 불과하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 위에 터전을 짓지 않고, 등기부등본이라는 추상의 세계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발로 뛰어 밝혀낸 자요에 따르면,“세입자와 주택 보유자를 불문하고 우리나라는 인구의 19퍼센트가 매해 이사를 다닌다. 전 인구 고스톱 다섯 명에 한 명골, 1년에 약870만여 명이 이삿짐을 싸고 푼다는 얘기”이다. 정주의 조건을 갖춘 집 있는 사람도 집을 터전이 아닌 투자가치를 지닌 부동산으로 이해하는 한 유랑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동산 가치의 동향이 집 있는 사람의 정주를 결정한다. 그 사람은 부동산 가치의 상승이 예상 되는 기간 동안만 정주한다. 혹시 폭락이 예상된다면 재빨리 그곳을 떠나 또 다른 폭등이 예상되는 곳으로 유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에게 유량의 횟수는 박탈이 아니라 재태크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에 다름 아니다. 부동산 가치의 상승을 쫓아 유량을 거듭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 부동산 가치를 찾아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웃한 사람의 가치는 내가, 그리고 그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무를 때만 의미를 지닌다. 나그네끼리는 원래 서로 관심 없는 법이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옆 집 사람보다 부동산 가치의 동향이 더 궁금하다. 평소에 이웃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던 사람들도 부동산 가격이라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서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렇게 무리 지은 동네 사람들은 이웃이라기보다 부동산 가격을 사수하기 위한 패당에 가까워진다. 패당은 부동산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은밀한 약속이 이뤄지는 반상회에서는 서로 반갑게 인사하지만, 패당의 화합이 끝나면 각자 인사도 없이 헤어진다. 집어등을 쫓는 물고기 떼와 같았던 패당의 무리는 집어등이 고스톱 꺼지면 이웃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사하지 않은 채 집에 올라와서는 컴퓨터를 켜고 혼자 고스톱을 친다.‘나 홀로 볼링’은 퍼트넘에게 하나의 은유였지만,‘나 홀로 고스톱’은 한국에선 이미 현실이다. 빚을 끼고 새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을 반기는 건 미리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웃이 아니라 빚으로 인해 생기는 걱정과 불안이다. 빚을 깔고 빚은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새 아파트로 이주하고 새 동네로 이주한 후에도 주위 사람들과 이웃 관계를 맺을 여유가 없다. 모두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제적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친절할 수 없고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제 코가 석자인 사람들이 무여 사는 곳의 풍경이다. 그 풍경의 한 단면은 이렇다.“‘재테크’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윤씨는‘한편으로는 잃은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새 동네에 이사 갈 때마다 마트와 약국, 빵집을 찾는 사소한 일까지 적응하는 것은 스트레스예요. 아이의 경우 유치원에서「친구하자」는 또래의 말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는 이사 가기 싫다고 엉엉 울기까지 해서 미술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죠. 사실 한 동네 살면서 이웃하고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어요. 반상회도 무관심해지게 되는데, 또 언제 이사 갈지 모르잖나 싶어서 그러거든요. 그런 태도가 저도 모르게 몸에 밴 것 같아요.’”그래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외판원이거나 전도하러 나온 사람이다. 와판원도 전도하러 나온 사람도 아니라면 나그네들은 서로 인사도 없이 헤어진 채, 나 홀로 고스톱을 치거나 ‘이웃’을 찾아 오늘도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목숨을 건다. 고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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